일본인 기술자, 한국인 경계병

태국의 중부 서부지역에 깐짜나부리라고 하는 도가 있다. 이곳은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이어서 동서양의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것이다.

그곳에서 80키로미터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특별한 기념관이 있다.
태국과 버마를 잊는 420키로미터의 군사전용 철도와 관련된 곳이다.
1943년 10월 16일 공사를 마치는데, 약 25만 명의 아시아 노무자와 6만 여명의 연합군 전쟁포로가 일본군에 의해 투입되었다.
이 가운데 11000여명의 전쟁포로와 75000여명의 노무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실한 음식과 매우 제한적인 치료, 열대병과 중노동, 그리고 일본군의 고문과 학대가 원인이었다.

희생된 전쟁포로와 노무자자들을 위하여 호주정부가 지원하여 개관한 기념관이다.
그런데 눈에 자주 띄는 단어가 있다.

‘일본인 기술자들, 한국인 경계병들’

인권이 유린되고, 국제법이 무시된 이 철도 공사에서 가장 피해자들은 연합군들 전쟁포로와 노무자들이다. 모두 10만 명 가까운 생명이 타향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가장 많은 해를 끼친 부류가 일본군 경계병들인데, 대부분 한국인 징병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일본제국의 군사문화와 아픈 한국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강제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온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일본군사문화에서 가장 천대받은 대상이었다.
경계병의 대부분은 한국인징병들이었지만, 이들의 상관은 일본군인들이었고,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군인들은 공병장교들인 일본인 기술자들이었다.
위에서부터 내려온 야만적인 위계질서에서 당한 한국징용 병들은 그들의 한과 고통을 연합군포로들과 노무자들에게 풀었던 것이다.

얼마나 연합군포로들이 당하였으면, ‘일본 기술자, 한국인 경계병’이라고 하였을까.
식량으로 보급되었던 식사를 ‘Pop(밥)’이라고 하였으니, 한국말이 왜곡된 전쟁의 역사 속에서 사용되었다.

한국징용 병들….
우리들의 할아버지들로서 아픔과 한을 간직한 가해자와 피해자들이다.
원치 않은 전쟁터로 끌려 나온 이들에게 일본군지도자들과 포로들 사이에서 이용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전쟁의 피해자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죽어서도 외면된 사람들처럼 보인다.

인간의 탐욕으로 시작된 전쟁의 피해가 너무 크고 오래 간다.
지금도 전쟁의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영원한 평화의 나라를 소망한다.
눈물과 아픔과 다툼이 없는, 왕의 왕 되신 예수님이 통치하는 나라이다.
그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가장 세상의 소망이다.